놀이라는 일종의 전통


전통예술이 하나의 장르인가, 질문을 가진 적이 있다. 탈춤 관련 지원서를 쓸 때 탈춤의 장르를 무용으로 기입해야할지 연희로 기입해야할지 헛갈렸다는, 평생 탈춤꾼들로 삶을 살아온 동료의 사연을 들으며 나 역시 해보지 않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탈춤의 장르를 고민하다 그럼 전통예술은 장르인가, 라는 질문으로 나아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등의 단어 뒤에 전통예술이 함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라는 것이 예술의 표현 양식을 구분하는 말이라면 전통예술은 그 안에 이미 음악, 무용, 연희 등 여러 장르가 있으니 다른 특수성이 전통예술을 하나의 묶음으로 구분 짓고 있을 것이다. 그 특수성이 무엇인지는 단숨에 설명할 수 없지만, 전통예술이 하나의 장르라고 규정할 만큼 우리의 의식 속에 어떤 공통된 감각,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전통예술은 이런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통예술의 일부를 전체로 단정 짓는 편견일 수 있을 것이다. 편견과 해석은 전통예술과 같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낸 산물 앞에서 지금의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겪어야 할 어떤 진동 같은 것이다. 해석일 수 있고 편견일 수 있는 경험을 공유하면 <오셀로와 이아고>를 준비하며 여러 전통예술 작업을 접하던 중에 무대의 기본 색이 늘 황토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대단할 것이 없는 발견이지만 경험이 양으로 쌓이다 보니 인식으로 질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황토색은 다소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상황을 다루거나 자연 공간이 아닌 곳에서도 적용되었다. 황토색의 무대를 벗어난다고 해도 나풀거리는 자연 소재의 의상이 기울어진 추를 바로 잡아 주었다. 미술 디자이너님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어떤 이미지가 있었으며 그것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은 미술뿐만 아니라 전통예술과 만나는 공연 요소 곳곳에서 생겨나는데 그것을 판단하는 근거는 어떤 무형의 느낌, 이미지였다. 언제가 미술 회의 중 디자이너님의 말씀에 같이 머리를 싸맨 적이 있다. “왠지 마루를 깔지 않으면 어색해요.”

그럼 전통예술의 주요 특징으로 거론되는 놀이는 어떤가. 연행자와 관객이 한데 어울려 어깨춤을 추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놀이를 어떤 하나로 규정할 수 없지만 춤, 재담, 노래 등 전통예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이미 놀이적 요소로 가득하다. 흔히 탈춤 등의 연희에는 사회와 권력에 관한 비판적인 요소가 가득하다고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에게 농을 거는 모습이나 꼭두각시놀음에서 홍동지가 벌거벗고 나와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는 것을 보면 그 자체가 권위에 관한 조롱이자 비판이다. 강령탈춤의 노장춤 과장을 보면 취발이는 소무를 향해 여자의 올바른 됨됨이를 연설하고 욕설을 뱉어낸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이놈의 기집애야 말 듣거라 허니 여자라 하는 것은 집안에서 침자(針刺: 바누질과 수놓다)질이나 하고 남편공경이나 깍듯이 할 것이지 이런 산간에 내려와서 저런 중놈하고 같이 노니. 너같은 쥐길 년이 어디 있나. 네 관상을 잠간 보니 양미가 여도(兩眉如刀 : 양쪽 눈썹이 칼날 같다)하니 필시상인(必是傷人 : 반드시 사람을 다치게 함)이요, 양목이 미첨(兩目微尖 : 양쪽 눈이 작고 날카로움)허니 필시삼가(必是三嫁 : 반드시 세 번 시집감)요 양협이 미홍(兩頰薇紅 : 양쪽 빨이 붉으스레)허니 필시음녀(必是淫女 : 반드시 음탕한 계집)라 네가 시집을 세 번은 가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소무의 치마를 들추어 보고 방 구경 한번 잘 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좀 더 직접적으로 보면 소무의 음부를 살피는 것인데, 이것을 공연할 수 있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여하튼, 취발이는 이때 소무를 희롱하며 재밌게 논다. 탈춤에 등장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 예쁘고 말이 없거나, 못생기고 말이 많다. 즉 예쁜 여자는 순종적이고, 못생긴 여자는 드세고 비판적이다. 더 나아가 예쁜 여자는 삶을 영위하지만, 못생긴 여자는 죽는다. 역시 강령탈춤의 미얄영감, 할미 춤 과장을 보면 할미는 집 나간 영감을 찾아다니는데, 영감은 젊고 예쁘고 말이 없는 여자를 데리고 온다. 할미 입장에서는 그렇게 찾던 영감이 바람을 피운 것인데, 영감은 눈이 돌아 오히려 할미를 타박한다. 할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에 몸을 던진다. 이 사실을 안 영감은 무엇을 할까. 할미의 극락왕생을 빌며, 논다. 즉, 놀이는 억압적인 위계질서의 전복을 꾀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놀이판으로 끌고 와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한다. 그 웃음거리의 대상은 주로 여성과 장애인이다. 

전통예술에 차별과 혐오가 노골적으로 혹은 은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지난 시대의 가치관일 텐데, 여기서 나누고 싶은 것은 놀이가 이런 차별과 혐오를 은근슬쩍 숨기고 웃음을 짓게 만드는, 일종의 은폐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처음 탈춤 대본과 기타 연희 대본을 접했을 때 이것을 실제 공연할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실제 공연화가 되고 놀이의 요소로 채워지는 순간 활자로 읽었을 때보다 거부감이 줄어들었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했다! 물론 관객의 감수성에 따라 감각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적어도 대본을 읽고 경계심과 적개심을 갖던 필자는 공연을 보면서는 대본을 읽었을 때의 불편함을 훨씬 적게 느끼며 공연을 관람했다. 이는 단순히 놀이의 요소일 수 있지만 인물의 행위와 의도, 감정이 뒤섞인 인물의 선택을 관객과 함께하며 나아가는 연극 혹은 기타 공연의 특징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놀이의 순기능인가, 역기능인가. 전통예술에 스민 가치관을 한마디로 말하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생각한다. 노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어서 빨리 놀아야 한다. 이 가치관은 막막한 현실을 달관의 세상으로 도약시키며, 고달픈 인생사의 편린을 대동의 세상으로 이어 붙이는 꿈을 꾸게 한다. 꼭두각시놀음에서 절을 짓거나, 판소리 뒤풀이의 끝을 어질더질로 끝맺는 것 모두 이런 가치관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치마를 들추며 놀 수 있고, 아내가 죽어도 놀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을 지나 더 큰 세상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 뭐 있어, 라는 말이 귓가에서 들리는 거 같다. 

놀이에 관한 사색을 좀 더 이어가자면 노는 것은 같이 하지 않으면 지친다. 같이 놀지 않으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또 일면 틀린 말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능에서 누군가가 노는 것을 그냥 즐기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전통예술 작업을 시작할 때 탈춤의 전 과장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보존회마다 탈춤 전 과장을 공연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어서 연중행사일 정도로 드물었다. 어렵게 두 번 탈춤의 전 과장을 접했는데 이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많은 질문을 갖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 관람 때는 탈춤의 전 과장이라고 하지만 적절히 압축된 형태였는데, 중간중간 부침개를 나눠주기도 하고 초대된 풍물패의 찬조 공연도 있었다. 이때 느낀 것은 탈춤의 전 과장을 관객과 함께 놀며 진행하는 것을 주최 측도 버거워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즐기기 위한 놀이의 요소라기보다는 관객의 집중을 이어가기 위해 중간중간 먹거리를 제공하고, 규모가 큰 풍물패를 불러 공연을 하는구나 싶었다. 마당에서 펼쳐졌지만 연행자와 관객은 구분되어 있었다. 연행자가 관객과 함께하려는 의도를 발견하기 어려웠고, 관객의 엉덩이 역시 무거웠다. 연행자와 관객 모두 적절히 노는 척하며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두 번째 관람은 실내에서 진행된 공연을 영상으로 접한 것이었는데, 길놀이의 맨 끝에 따라오는 연행자는 춤사위를 잘 알지 못해 앞에 분의 춤사위를 뒤늦게 따라 하거나 자주 틀리곤 했다. 아마도 탈춤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으로 보였다. 아마 공연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같이 노는 판이었다면 사그라지는 불씨에 휘발유를 붓듯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찬 미숙함은 오히려 놀이에 흥을 돋우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의 흥으로 가득했을 놀이판이 무대화되면서 미숙함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해본다. 놀이는 어쩌면 마당이라는 연행 형태에서 확장되고 견고해진 것은 아닐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공동체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참여의 마음이 우리를 놀게 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전통의 현대화’, ‘전통의 동시대화’란 말을 쓰곤 한다. 개인적으로 이 말을 ‘전통의 극장화’, ‘전통의 실내화’라고 고쳐서 되뇐다. 치마를 들추어 방을 잘 꾸몄다고 재담을 뿜어내는 취발이를 통과하여, 참여의 의지는 강력하나 모든 것이 서툰 참여자와 함께 어떻게, 함께 잘 놀 것인가. 편견 혹은 해석 어디쯤에서 헤매는 말이겠지만, 놀이의 짐을 조금 벗어나면 어떨까. 혹은 놀이의 요소를 지금의 시선으로 점검해 보면 어떨까. 같이 놀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고단한 일상을 보낸 뒤 프로시니엄 객석의 어둠에 자신을 숨기고 가만히 놀이를 관람만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셀로와 이아고> 공연을 준비하며 여러 질문을 통과했는데 마지막 맞이한 것은 보편적 가치관을 담아보자 하는 것이었다. 우선 과거의 가치관을 벗어나 지금의 가치관을 담는 것으로부터 관객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극장에 관한 고민이 함께했다. 극장은 내지르듯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소리가 잘 들리는 곳이다. 작은 움직임도 돋보기를 댄 듯 잘 보인다. 음향 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이며, 조명으로 관객의 시선을 이동시킬 수 있는 곳이다. 가치관의 전달 방식도 실시간 반응이 없다고 해도 조금 길게 시간을 갖고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질문할 서사를 갖출 수도 있다. <오셀로와 이아고> 연출의 글에 ‘60분 동안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춤을 추겠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극장으로 들어오는 연희에 관한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다소 과한 주장일 수 있으나, 전통예술의 요소가 다른 것을 만나는 재료가 될 수 있을 때 그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예술 작업을 하며 새로워질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나는 스스로 깊어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른 것을 만나는 것이다. 다른 것 중에 가장 큰 하나가 바로 극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연행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다. 연희가 야외 마당을 전제로 닦여진 양식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놀이도 같이 포함된다. 전통예술 창작자와 협업하며 하나의 욕심은 전통의 가치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창작된 작품의 가치로 구체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공연이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 시대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캐어내고 있는지. 그렇다면 놀이는 어떤가, 다시 질문한다. 편견인지 해석인지 모를 길을 미끄러지듯 지나치고 있다. 


(공연과 이론, 2024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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