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니아

노래에 자리 잡은 비명
[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개막작 ‘(아)폴로니아’]

문을 열고 들어가 입구와 방향이 다른 출구로 나오는 것. 그래서 처음과는 다른 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이야기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이다. 흥부는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터져 나오기 전 뺨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어야 했으며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눈을 스스로 찌르기 전 태평성대를 누렸다. 이야기는 이렇듯 상황의 변화를 통해 말을 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여기 비명으로 시작해 노래로 끝나는 한 편의 공연이 있다. ‘(아)폴로니아’ 는 침묵으로 시작하지만 그 침묵은 비극을 숨긴 침묵이며 얼마 후 그 침묵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갖 비명이 쏟아진다. 울부짖음과 같은 말, 몸부림이 계속된다. 하지만 비명이 잦아들고 그 반대편 문을 열고나올 때는 노래가 흐른다. 네 시간 공연의 시작과 끝은 그러하다. 비슷한 듯 다르게 자리 잡고 있는, 비명과 노래.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3명의 여인-이피게니아, 알세스티스, 아폴로니아-이 바로 그 징검다리이다. 그리스 비극과 현대소설의 극중 인물인 이들은 공연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피게니아는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군 총사령관인 아버지 아가멤논에 의해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인물이며, 알세스티스 역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남편 아드메토스 대신 제물로 바쳐진다. 아폴로니아는 나치 치하 폴란드에서 유대인 24명을 돌봐준 죄로 처형된 폴란드 여인이다.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세 여인의 이야기는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서로 관련이 없는 듯 떨어져있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마치 징검다리처럼 떨어져 놓여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는 세 여인의 이야기를 잇는 것은 음울한 정서인데 이 음울한 정서는 세 여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주변인물의 불안과 긴장을 통해 조성된다. 공연 중간 중간에 등장인물의 모습이 실시간 영상으로 무대 뒷면에 투사되는데 영상은 공연 전반의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출은 그 음울한 정서를 증폭시키거나 잦아들게 하면서 공연을 이끌어간다. 영상의 대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거나 무대 밖에서 펼쳐지는 무용에 가까운 움직임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데 사용되고 있다. 확대된 사람의 표정은 하나같이 불안하다. 왜냐하면 죽음을 방관하거나 묵인한 자들로 그들은 나 '대신' 죽는 제물을 모른 체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움직임이 욕망(죽기 싫다)과 방해물(제물로 죽어야 한다)이 충돌해 생겨난 몸부림이라면 그 움직임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물의 표정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클로즈업과 다를 것이 없다. 불안과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런 극적 분위기는 무대디자인에도 담겨있다. 밀폐된 방 형태의 이동식 무대는 에피소드 구성을 시각화하였는데 그 무대는 유리로 막혀 있거나 틀로 구획되어 관객이 극중 인물들을 몰래 숨어 보는 듯 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역시 불안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는 듯 우리는 그들의 불안을 저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무대 밖의 관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대 안에 저들과 같이 존재하지만 다른 입장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코러스다. 밴드의 연주에 노래를 부르는 인물, 그녀를 아무도 코러스라 부르지 않지만 그녀의 역할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에서 기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노래하는 배역을 맡고 있지만 다른 인물과는 달리 고통스런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 고래 그리스 비극에서 기원한 코러스는 지금도 그 역할이 논의되고 해석되고 있지만 '(아)폴로니아'의 코러스는 비명에 가까운 탄성과 몸부림에 빠진 극중 인물과는 달리 그들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지점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 닿아 있는 부분이며 관객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의인화 할 수 있다면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점도 코러스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카메라의 시점은 자신이 본 인물의 표정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며 필요하다면 인물의 비명과 같은 몸부림을 따라간다. 비명을 같이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명'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비명과 노래는 그 처지가 다르다. 비명은 외부의 압력에 대응하는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노래는 즉각적인 반응을 벗어나 감정을 조절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기(禮記)]의 [악기(樂記)]편에서 성(聲)은 외부에 대한 반응이며 이 성(聲)이 문채를 이루었을 때 음(音)이 된다고 말한다. 문채를 이루었다는 말은 즉각적인 반응을 벗어나 그 감정을 조율하여 질서를 잡는 것이다.

비명과 노래, 즉 극중 인물과 코러스의 만남이 '(아)폴로니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이 된다. 더 확장하자면 비극적인 상황과 관객과의 만남이 공연의 중요한 지점이며 연출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핵심적인 형식이다. 이 공연을 공연 자체의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출은 세 여인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세 여인은 서로 무슨 관련이 있으며 지금 세 여인의 비극을 나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연의 말미에 연출은 극중 인물의 입을 통해 직설화법으로 말한다. 나치 치하 폴란드에서 유대인 24명을 돌봐준 죄로 처형된 폴란드 여인, 아폴로니아가 있었기에 지금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은 아니냐고. 다소 갑작스럽고 그래서 당황스럽다.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계몽적인 내용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딸을 바다에 던져 신을 달래어 순풍에 배를 띄운 아가멤논처럼, 부인을 자기 대신 죽게 해서 살아남은 아드메트스처럼 지금 너희들은 아폴로니아를 희생양으로 삼아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개연성 있는 설득이 빠져있다. 인과적인 사건으로 엮어진 전개는 아니지만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당혹스러움을 지켜보며 연출은 미소를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연출은 공연의 형식으로 이런 내용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이 탐구하며 따라와 주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니라 비명과 같은 몸부림을 외면하며 얼떨결에 지금에 이르렀다. 이것을 어떻게 형상화 할 것인가? 연출은 비극의 여인 사이를 미끄러지며 코러스가 노래하게 한다. 비극의 징검다리를 오가며 노래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징검다리, 즉 모든 여인, 모든 등장인물을 불러내어 코러스와 같이 노래하게 한다. 누구는 노래하고 누구는 춤추고 누구는 누워있다. 모든 비극이 사라진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방에서 펼쳐진다. 지난 시간의 에피소드처럼 지금도 하나의 방, 하나의 에피소드로 자리 잡는다. 다가올 시간을 건너갈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도 또 하나의 비극으로 자리 잡을 것인가? 코러스의 노래 중 현재 폴란드의 가요가 포함되어 있고 공연 제목인 [(아)폴로니아]에서 괄호처진 (아)를 빼면 지금의 폴란드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극의 여인 아폴로니아의 상황에 폴란드가 속해 있는 것인가, 아니면 폴란드의 상황에 아폴로니아가 속해 있는 것인가. 폴란드와 아폴로니아의 관계처럼 비명과 노래는 서로 속해 있다. 비명을 벗어나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지금의 노래 속에는 비명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이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지금의 시간에 쏟아져 내린 것처럼.

[플랫폼](11/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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