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생명력 있는 날갯짓을 위하여
극단 MIR [갈매기]


체홉의 희곡을 공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갈매기]는 더욱 그렇다. 희곡의 세부적인 설정을 말하기 전에 일단 그 텍스트의 양이 방대하다. 광활한 희곡의 공간을 한정된 공간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함축적인 무대와 효율적인 무대 전환이 요구되며, 긴 시간 진행에 따른 의상과 대소도구의 준비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등장인물 중 어느 하나가 욕망의 나침반을 따라 행진을 게을리 하지 않기에 인물의 치밀한 분석과 연습 과정에서 배우와의 진득한 교감이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긴 연습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제작여건도 수반되어야 한다. 국내에서 공연된 [갈매기]중 관객과 평단에 회자 되었던 작품들이 제작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았던 국립 단체의 공연이거나 희곡의 정서를 삶으로 받아들인 유럽 극단의 초청공연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만만치 않은 체홉의 [갈매기]는 인천에서 어떻게 날갯짓하고 있는가? 극단 MIR의 [갈매기]는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체홉의 희곡에서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좀 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희곡 [갈매기]를 읽는 것과 공연 [갈매기]를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고, 받고 싶은 마음을 통틀어 사랑이라고 한다면 [갈매기]의 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빠져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담을 건네고, 하소연을 하고, 고백을 하지만 모든 노력들은 허사로 끝나버린다. [갈매기]에서의 주된 사건은 이런 사랑의 어긋남이다. 사건을 통해서 이야기의 지도가 그려진다면 [갈매기]의 인물들은 자신이 원하는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지도의 이정표를 따라 절망과 폐허로 향한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추락하는 이 가혹한 서사가 [갈매기]의 서사이다. 

연출은 파멸의 길에 빠진 니나와 꼬스챠를 제외한 그 밖의 인물들을 박제된 갈매기에 빗댄다. 사랑 앞에서 머뭇거려 마지막 추락을 피한 인물들의 일상, 즉 평온하게 카드게임을 하는 모습과 진열장에 놓인 박제된 갈매기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그들의 평온한 일상이 실은 생명력을 잃은 박제된 삶이라고 은유한다. 사랑하면 멸망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는다는 이 가혹한 선언은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측은한 인간 모습의 한 단면이다. 

연출이 박제된 갈매기를 통해 투영시킨 가치관, 즉 주제의식은 공연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희곡의 설정들을 충실히 재현하며 작품을 통해 표현할 가치관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연출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게다가 커튼콜을 하지 않는데, 커튼콜이 배우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는 격려의 의미를 넘어 관객이 자기 동일시된 극중 상황과 인물을 정리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정화(淨化)의 의식이라고 한다면 연출은 커튼콜 없이 관객을 세상에 내던짐으로 그 잔인한 서사가 현실로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희곡의 충실한 재현은 공연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경배에 가까운 재현은 여러 곳에서 무거운 짐처럼 여겨진다. 우선 배우의 연기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짐들이 발견된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인물은 마샤인 듯하다. 그녀는 꼬스챠를 사랑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메드베젠꼬와 결혼을 한다. 인물의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고뇌에 찬 모습이 겉으로 크게 부각되어 구체적인 인물의 모습이 드러나기 보다는 고민의 무게가 먼저 보인다. 중요한 선택(행동)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고 생명력을 얻는다면 마샤는 그 선택으로 향하는 대사의 의도들이 고민의 무게로 흐려진다. 

그리고 공간적 설정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했던 무대역시 짐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좁은 극장 공간에서 고군분투한 무대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공연 전반부에 잠시 사용되는 1막의 무대를 공연 끝까지 배치한 것은 효과적인 선택이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로로 긴 형태의 공연장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잠시 활용되는 1막의 무대를 한쪽에 배치해서 흔하지 않은 공연장의 형태를 흔한 정방향의 극장으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황폐해지는 꼬스챠의 모습을 1막 무대를 통해서 시각화하는 효과를 덤으로 얻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불편함을 공간이 주는 선물로, 다른 생각을 해보는 창조적 한계로 여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짐들은 관객을 대하는 태도로 확장되어 위축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공연의 끝에 커튼콜을 진행하지는 않지만 커튼콜의 기능은 온전히 남아있다. 배우에게 박수를 치는 커튼콜은 없지만 ‘이번 공연은 커튼콜을 진행하지 않는다.’라는 친절한 멘트로 관객이 극을 벗어나 자신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 안내 멘트가 없었다면 관객이 당황하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운 상황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연극적 재미로 관객과 배우에게 즐길 시간으로 주었으면 어땠을까? 공연이 끝난 것인지 아닌지 그 어물쩍한 분위기를 박차고 나왔을 때 연출의 의도가 극대화 되지 않았을까? 아니, 관객이 극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져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게 되었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짐들은 원작을 존중하고 희곡의 매력을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생겨난 긍정적인 성장 통이다. 원작에 대한 존중은 중요한 나침반이다. 하지만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킬 뿐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여행자의 몫이다. 극단 MIR의 [갈매기]를 제작 여건이 좋은 국립 단체의 [갈매기]나 희곡의 정서를 생생하게 담아낸 유럽 극단의 [갈매기]와 비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극단 MIR [갈매기]만의 매력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체홉의 희곡을 공연하는 것만으로 세속적 가치에 저항하는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진흙탕 자본주의 세상에서 연꽃처럼 피어나는 느림의 미학을 무대에서 확인하는 감동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이어도 보호받아야 한다. 더불어 주머니 속에 미디어를 휴대한 관객 앞에 직접 몸을 내보여 실존으로 답한 배우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희곡 [갈매기]를 읽는 것과 공연 [갈매기]를 보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플랫폼[11/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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