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늠할 수 없는 세상에 던지는 질문
리미니 프로토콜 [100% 광주]
2014년 4월 19일~20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동시대성에 대한 갈망은 동시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증한다. 광주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겪어낸 ‘지역의 정체성’은 ‘지역감정’과 같은 혼란의 말로 분탕질 놓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되새겨야 할 의미와 가치를 혼란의 영역으로 끄집어 내리는 수많은 언어와 사건들이 득세할수록 다시 한 번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도 따라 커졌는지 모른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이와 같은 갈망과 혼란이 담겨있다.
광주를 대표하는 100인의 시민이 무대에 오른다. 성별, 국적, 주소, 나이의 분포도에 따라 구성된 이들은 “우리는 광주를 대표합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광주를 대표하는 이들이 무대에 오르고 또 다른 광주 시민이 관객이 되어,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형상이 된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는 이와 같이 같은 처지의 우리를 무대와 객석에 자리 잡게 해서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개인의 사소한 취향으로부터 시작해 광주에 대한 묵직한 문제를 거쳐 우리네 인생에 대한 사색으로까지 이어진다.
관습적으로 존재하는 제4의 벽(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가상의 벽)을 깨는 것이 또 다른 공연 형태로 자리잡은지 오래지만,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는 조금 색다르다. 보통 배우와 관객의 소통은 어느 한 쪽, 특히 배우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질문을 무대에 있는 우리가 답하고 그것을 객석에 있는 또 다른 우리가 지켜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질문들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에 관한 것들이다. 가령, 5.18 민주화운동은 과거의 지난 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 항쟁을 넘어서 더 나은 미래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지금의 문제로 재조명된다. “나는 120년 안에 죽습니다”라고 미래의 문제를 확인시켜 주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인생의 허망함을 인식하고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지금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국 이런 질문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나와 같이 숨 쉬고 있는 시대의 의견을 듣고, 보게 된다.
소위 다큐멘터리 연극의 선두주자인 리미니 프로토콜은 지금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 즉 동시대성에 대한 열망을 무대에 오롯이 담아낸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통계를 통한 계량화이다. 공연에서 중요한 무대 구성 중 하나는 원 모양의 스크린인데, 원은 그 중심을 나누는 각도의 비율에 따라 면적도 같은 비율로 나누어지는 도형이다. 수치의 정도를 원의 분할된 면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기에 통계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시하는데 두루 쓰인다. 리미니 프로토콜은 무대 전면에 원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곳에 광주를 대표해서 무대에 오른 100인의 이동을 실시간 영상으로 투사한다. 즉 질문에 대한 답의 분포를 원형 스크린에 투사하여 관객이 그 결과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통계의 수치를 면적이라는 물질로 체감시켜, 단번에 우리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00명의 의견이 일치하는 100%의 답변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10억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질문에 모두 그렇지 않다고 답했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그런 부자가 곳곳에 있음을 알고 있다. 질문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알려고 했던 노력들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참으로 다양하고 우리는 어떤 확정된 결과로 단정지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한다. 가령 “나는 성매매를 한 적이 있습니다.”라던가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습니다.”라는 질문에서 관객은 드러나는 숫자에 스스로도 놀라 웅성거린다.
지구상에 천적이 없는 유일한 종(種)인 인간은 은연중에 안전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확신에 차있다. 수백 명의 학생과 여행객을 수장시킨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무대에 선 많은 참가자들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는데, 이는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시대의 불확실성에 대한 애처로운 탄성이기도 했다. 천적이 없는 세상, 위협이 없는 세상이라고 확신했지만 정작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 앞에 펼쳐질 상황을 가늠할 수 없고 때로는 인간의 천적은 바로 인간이라는 잔인한 결론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지구상에 가장 우월한 종(種)으로서 갖는 확신은 실은 가장 근거 없는 생각이며 오히려 인간의 불확실성을 가장 자극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만이 현대인이 갖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전부라면 우리는 어쩌면 콧노래를 부르며, 동시대에 대한 탐구를 중단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당신이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해 본적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당신이 우리 집 오리 탕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영어를 잘 하는지도 궁금하고, 괜찮은 새누리당 후보가 광주에 출마한다면 찍을 것인지도 궁금하다.(프로그램에 실린 참가자들의 질문들) 그래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이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미궁을 헤쳐나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공허한 울림이 될 수도 있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 것인가, 무심코 던진 돌이 될 것인가? ‘나는 10년 안에 죽을 것이다.’라는 질문에 웃음 띤 얼굴로 홀로 무대 가운데 섰던, 일제 강점기 때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한 84세의 할머니가 주는 애절함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었을까? 우리는 때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답을 얻게 된다. 불확실성을 벗어나려고 던진 질문들은 확실한 것은 없다, 라는 확인으로 돌아오며 때론 더 큰 혼돈으로 빠지는 지름길로 우리 앞에 놓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굳이 질문을 던져 우리의 불확실성을 확인하고 서로의 다름을 보는 것일까. 혼돈이 유일한 삶의 에너지인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우리는 같은 짐을 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해결할 수 없는 짐임을, 우리가 숙명처럼 짊어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게임을 우리가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위로는 해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공유할 때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가늠할 수 없는 세상에 질문이라는 돌을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수심을 가늠할 수 없을지라도, 다름과 불확실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2014년 4월 19일~20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동시대성에 대한 갈망은 동시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증한다. 광주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겪어낸 ‘지역의 정체성’은 ‘지역감정’과 같은 혼란의 말로 분탕질 놓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되새겨야 할 의미와 가치를 혼란의 영역으로 끄집어 내리는 수많은 언어와 사건들이 득세할수록 다시 한 번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도 따라 커졌는지 모른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이와 같은 갈망과 혼란이 담겨있다.
광주를 대표하는 100인의 시민이 무대에 오른다. 성별, 국적, 주소, 나이의 분포도에 따라 구성된 이들은 “우리는 광주를 대표합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광주를 대표하는 이들이 무대에 오르고 또 다른 광주 시민이 관객이 되어,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형상이 된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는 이와 같이 같은 처지의 우리를 무대와 객석에 자리 잡게 해서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개인의 사소한 취향으로부터 시작해 광주에 대한 묵직한 문제를 거쳐 우리네 인생에 대한 사색으로까지 이어진다.
관습적으로 존재하는 제4의 벽(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가상의 벽)을 깨는 것이 또 다른 공연 형태로 자리잡은지 오래지만,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는 조금 색다르다. 보통 배우와 관객의 소통은 어느 한 쪽, 특히 배우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질문을 무대에 있는 우리가 답하고 그것을 객석에 있는 또 다른 우리가 지켜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질문들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에 관한 것들이다. 가령, 5.18 민주화운동은 과거의 지난 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 항쟁을 넘어서 더 나은 미래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지금의 문제로 재조명된다. “나는 120년 안에 죽습니다”라고 미래의 문제를 확인시켜 주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인생의 허망함을 인식하고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지금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국 이런 질문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나와 같이 숨 쉬고 있는 시대의 의견을 듣고, 보게 된다.
소위 다큐멘터리 연극의 선두주자인 리미니 프로토콜은 지금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 즉 동시대성에 대한 열망을 무대에 오롯이 담아낸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통계를 통한 계량화이다. 공연에서 중요한 무대 구성 중 하나는 원 모양의 스크린인데, 원은 그 중심을 나누는 각도의 비율에 따라 면적도 같은 비율로 나누어지는 도형이다. 수치의 정도를 원의 분할된 면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기에 통계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시하는데 두루 쓰인다. 리미니 프로토콜은 무대 전면에 원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곳에 광주를 대표해서 무대에 오른 100인의 이동을 실시간 영상으로 투사한다. 즉 질문에 대한 답의 분포를 원형 스크린에 투사하여 관객이 그 결과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통계의 수치를 면적이라는 물질로 체감시켜, 단번에 우리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00명의 의견이 일치하는 100%의 답변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10억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질문에 모두 그렇지 않다고 답했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그런 부자가 곳곳에 있음을 알고 있다. 질문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알려고 했던 노력들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참으로 다양하고 우리는 어떤 확정된 결과로 단정지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한다. 가령 “나는 성매매를 한 적이 있습니다.”라던가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습니다.”라는 질문에서 관객은 드러나는 숫자에 스스로도 놀라 웅성거린다.
지구상에 천적이 없는 유일한 종(種)인 인간은 은연중에 안전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확신에 차있다. 수백 명의 학생과 여행객을 수장시킨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무대에 선 많은 참가자들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는데, 이는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시대의 불확실성에 대한 애처로운 탄성이기도 했다. 천적이 없는 세상, 위협이 없는 세상이라고 확신했지만 정작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 앞에 펼쳐질 상황을 가늠할 수 없고 때로는 인간의 천적은 바로 인간이라는 잔인한 결론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지구상에 가장 우월한 종(種)으로서 갖는 확신은 실은 가장 근거 없는 생각이며 오히려 인간의 불확실성을 가장 자극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만이 현대인이 갖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전부라면 우리는 어쩌면 콧노래를 부르며, 동시대에 대한 탐구를 중단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당신이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해 본적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당신이 우리 집 오리 탕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영어를 잘 하는지도 궁금하고, 괜찮은 새누리당 후보가 광주에 출마한다면 찍을 것인지도 궁금하다.(프로그램에 실린 참가자들의 질문들) 그래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이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미궁을 헤쳐나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공허한 울림이 될 수도 있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 것인가, 무심코 던진 돌이 될 것인가? ‘나는 10년 안에 죽을 것이다.’라는 질문에 웃음 띤 얼굴로 홀로 무대 가운데 섰던, 일제 강점기 때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한 84세의 할머니가 주는 애절함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었을까? 우리는 때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답을 얻게 된다. 불확실성을 벗어나려고 던진 질문들은 확실한 것은 없다, 라는 확인으로 돌아오며 때론 더 큰 혼돈으로 빠지는 지름길로 우리 앞에 놓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굳이 질문을 던져 우리의 불확실성을 확인하고 서로의 다름을 보는 것일까. 혼돈이 유일한 삶의 에너지인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우리는 같은 짐을 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해결할 수 없는 짐임을, 우리가 숙명처럼 짊어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게임을 우리가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위로는 해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공유할 때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가늠할 수 없는 세상에 질문이라는 돌을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수심을 가늠할 수 없을지라도, 다름과 불확실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플랫폼[2014,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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