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
소극장 산울림 개관 30주년 특별기념공연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한국에서 고도를 기다린 지 반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산울림 소극장 개관 기념공연으로 시작한 지 30년, 초연으로 부터는 45년의 시간이 흘렀다. 피터 브룩Peter Brook(1925~ )은 자신의 저작인 [빈공간]에서 ‘하나의 공연이 지속될 수 있는 최대 기간은 오 년 정도’라고 밝히며 ‘시간이 흐르면 이내 낡아 보이는 것이 머리 모양, 의상, 화장법 뿐만은 아니다. 몸짓, 손짓, 말투와 같이 인물의 마음 상태와 정서를 전달하는 행위 양식을 비롯하여 공연에 필요한 그 밖의 다른 모든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 주식 시장에서 늘 변동하고 있다. 삶은 끊임없이 유동하며 배우들과 관객들은 이에 영향을 받는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의 공연이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교감하며 창조의 활력을 잃지 않는 시간을 오 년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십년이면 강산도 변화시키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45년 동안 쉼 없이 공연된 것은 아니지만, 공연이 다시 시작될 때마다 수많은 관객이 찾아와 객석을 채우고 호응을 보내는 것을 보면 공연의 생명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 포스터의 <45년의 명무대, 13인 명배우 총 출연>의 문구에는 시간을 이겨낸 자부심과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자축하는 의미가 함빡 담겨있다.
해가 뜨면 두 사람, 즉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반복되어 다음날에도 계속된다. 날이 밝으면 다시 고도를 기다리고,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다시 해가 진다. 같은 구조의 1막과 2막을 통해서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두 사람이 살아있는한 계속될 일임을, 그들의 운명 같은 질곡임을 암시한다. ‘도대체 고도가 누구야?’라는 탄성어린 질문에는 고도를 기다리며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뒤섞여있다.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1906~1989)가 “고도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이미 답이 없는 질문임을 밝혔지만 고도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고 되려 커져만 간다. 고도가 누구인지, 고도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은 관객이 작품을 통해 얻는 사유의 여정이다.
그 여정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연출의 말을 빌리면 부조리극의 정수로 평가받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초연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일단,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고 줄거리 파악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출연자들끼리도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랐다고 하니 작품을 사이에 둔 혼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 혼란은 지금의 관객에게도 전해지고 있으니 연습 도중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빈자리가 없이 연일 매진을 기록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두 인물이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흘러간다. 기다림은 시간이라는 장애물을 이겨내려고 더 강렬해지거나, 무료함으로 약해지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것이 욕망으로 보이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욕망이 달궈져있지 않기에 인물들은 기뻐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인물의 행동에 따라 변하는 것은 없으며 극의 모든 설정은 욕망처럼 밋밋하다. 강력한 욕망을 지닌 것만으로 관객은 극중 인물에게 자기를 동일시한다. 인간이란 존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 사이에서도 욕망하는 인물만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이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인물이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의 굴곡에서 생겨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은 극중 인물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관객에게 전해져 한통속이 된다. 이런 인물의 변화를 통해 이야기는 가치관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물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도착하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을 욕망하지 않는 이 기이함이 극을 난해하게 만들며, 도대체 욕망 없는 인물들을 왜 지켜보고 있는지 관객은 스스로 묻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한 부분이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맞서야 할 대상을 잃은 채, 선택의 기로에 서지 못하고 행위의 목적을 찾지 못하는 인물들의 부조리함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 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그래서 자신이 무엇에 행복해 하는지조차 모르는 부조리한 상황은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만 닥친 것이 아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정작 의미를 찾지 못해 뜬 눈으로 신음하는 불면의 밤과 환한 미소와 긍정의 마음 뒤에 웅크리고 있는 우울증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이 시대의 곳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한국의 흥행을 이어 사무엘 베케트의 나라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까지 호평을 받은 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비극적 인물들에게 웃음이라는 넉살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와 엉성한 인물구축은 삶의 비극 앞에서 무력한 인간 군상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해학과 풍자가 난해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뽐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내내 관객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작품의 해석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뎐내어 건재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명배우로 거듭난 출연 배우들의 노력은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 듯 하다. 우선 대사의 실수가 많이 보였다. 상황에 몰입된 인물이 보이다가 오랜만에 대본을 들춰내어 급히 숙지한 배우의 황급함이 곳곳에서 노출되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오히려 45년의 역사를 통해 성장한 배우의 애정 어린 노력으로 보여 거슬리지 않았다. 공연을 만든 창작자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기념비적 공연이기에 축하의 마음을 잃지 않고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웃음의 넉살은 그 경계가 모호하여 작품의 본질적인 의미를 흐리는 경우가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필요 이상으로 관객 옆에 앉아 웃음을 유발한다던가 욕망 없이 두리번거리는 인물을 깨고 관객에게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작품의 명성을 깨는 치명적인 부분이라 생각된다. 무료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관객과 즐거움을 나누려는 시도는 이미 극중 인물이 아닌 것이다. 45년의 시간을 견뎌낸 것은 산울림만이 가졌던 넉살의 [고도를 기다리며]였지 관객에게 애써 웃음을 유발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닐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이 45년의 자료를 선별하여 [고도를 기다리며] 아카이브 전을 2014년 12월부터 이번 공연이 끝나는 5월 말까지 진행하고 있다. 아카이브 전과 연계하여 배우 대담을 진행하는 등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걸어온 시간을 축하하고 있다. 하지만 공연은 새로운 관객,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짐을 짊어지고 있다. 45년의 시간을 견뎌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앞으로의 시간을 맞이하는 방법이 관객에게 필요 이상으로 소통을 시도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넉살의 미학을 잃지 않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렸으면 한다. 관객의 웃음을 기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플랫폼[2015,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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