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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의 시간

<틴에이지 딕> 공연을 마치고, 마침 코로나에 걸렸다. 공연을 마치고 바로 일들이 있었는데, 덕분인지 때문인지 코로나로 일정들이 싹 지워졌다. 그리고 근 한 달을 어슬렁거렸다. 코로나 후유증인지 그냥 체력이 고만고만하게 맞춤이 되었는지 하루에 하나의 일정만 하면, 그만 집에 들어와야 목이 아프지 않다. 오전에 일정이 있고 저녁에 일정이 있으면 그사이 집에 들어와 잠을 잔다.  자연스럽게, 먼지 날리듯 푸석거리며 살던 삶이 조금 잠잠해졌다. 잠이 안 올 때까지 자기도 하고, 메모장에 남겨둔 아주 작은 일, 이를테면, 제본하기, 전화하기 등등의 일까지 다 하고도, 멍하게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고 이어지자. 사고 싶은 책을 사고, 빈말로 지나친, 한번 보자, 했던 사람이 누구였지 되새겨보며. 아, 난 이런 사람이구나. 발견한다. 집에 있는 것이 가장 좋고, 혼자 있어도 심심함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만나지 못해 빈말이 되었지만, 인사말을 남기는 순간은 그래도 진심이었구나, 싶다.   대본 말고 책을 읽을 수가 없구나, 집중이 안 되는구나 싶었는데 읽히는 책들이 있다.  <마이너리티 디자인> 소정 배우님이 연습 때 거론한 책이었는데 궁금했다. 우선 소정 배우님의 단단함이, 그 궁금함이 책으로 이어졌다. 책 제목이 궁금해서 배우님께 여쭤봤는데 아예 책을 보내주셨다.  <인생의 역사> 좋은 글은 좋은 문장에서 시작되고, 문장과 단어와 글이 어떤 하나임을, 그 힘이 느껴지는 사람. 신형철이다. 전체와 부분이, 구조와 내용이 하나로 굳어져 있어 틈이 없다.  <위대한 식재료> 이영미 선생님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그냥 마냥 좋고 경외심을 갖고 있는 분이다. 걸어간 만큼 흔적을 말씀하시는 분이기에 어떤 글이라도 그냥 좋다. 그런데 웬 걸, 식재료라니. 동명이인이지 싶었다. 그런데 이영미 선생님의 ...

들개, 이끼, 메밀밭

  <금조 이야기> 연출노트   2022. 공연과이론. 여름호.  들개 이끼 메밀밭 들개 그리고 말, 곰 <금조 이야기>는 금조가 딸을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딸이 어디 있는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금조는 무언가에 이끌려 떠돈다. 금조를 이끄는 것은 딸을 찾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실제 금조는 딸과는 무관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기차를 따라 피난민이 없는 전쟁터로 향하고, 아이가 없는 옛 수력발전소 안으로 들어가고, 막연한 이유로 위험을 무릅쓴다. 알 수 없는 무엇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긴다는 점에서 들개도 비슷하다. 들개 역시 냄새 혹은 어떤 기억으로 떠돈다. 옛 수력 발전소의 흔적 앞으로, 왠지 모를 사냥의 기운으로 떠돌고 떠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알 수 없는 여정은 수많은 딸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전쟁터에 홀로 남겨진 이들, 무언가를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소녀가 그렇고 여인들이 그렇고 금조 자신이 그러하며 들개이자 표범인 아무르 역시 그렇다. 시를 잃었다는 점에서 시인이 그렇고, 사람의 정을 잃었다는 점에서 역무원이 그렇다. 등장인물 중에 ‘고아들’이 있는데 이 명칭을 다시 사용해 말하자면 극 중 인물들은 모두 고아다. 그러니까 <금조 이야기>는 고아들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연대는 눈물겹고 때로는 매정하다. 그렇다면 <금조 이야기>에서 나오는 이들은 모두 같은가? 그렇지 않다. 차이가 있으며, 특히 들개가 다르다. 아무르라는 표범은 야생성을 잃고 사육되면서 들개의 삶을 살기로 한다. 그리고 죽음 직전 금조 덕으로 목숨을 구하고 결심한다. “이젠 내가 널 도울게” 전쟁터에선 모두가 누군가의 신발을 빼앗는 신발 장수이지만, 들개만은 금조에게 몸을 내어주며 신발 장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가 아이한테 전해지길 원한다. 들개는 어쩌면 공포의 신발 장수 이야기를 나눔의 ‘들개 이야기’로 바꿔내고 싶은 존재이다. 들개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