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 이끼, 메밀밭

 <금조 이야기> 연출노트 

2022. 공연과이론. 여름호. 


들개 이끼 메밀밭




  1. 들개 그리고 말, 곰

<금조 이야기>는 금조가 딸을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딸이 어디 있는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금조는 무언가에 이끌려 떠돈다. 금조를 이끄는 것은 딸을 찾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실제 금조는 딸과는 무관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기차를 따라 피난민이 없는 전쟁터로 향하고, 아이가 없는 옛 수력발전소 안으로 들어가고, 막연한 이유로 위험을 무릅쓴다. 알 수 없는 무엇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긴다는 점에서 들개도 비슷하다. 들개 역시 냄새 혹은 어떤 기억으로 떠돈다. 옛 수력 발전소의 흔적 앞으로, 왠지 모를 사냥의 기운으로 떠돌고 떠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알 수 없는 여정은 수많은 딸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전쟁터에 홀로 남겨진 이들, 무언가를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소녀가 그렇고 여인들이 그렇고 금조 자신이 그러하며 들개이자 표범인 아무르 역시 그렇다. 시를 잃었다는 점에서 시인이 그렇고, 사람의 정을 잃었다는 점에서 역무원이 그렇다. 등장인물 중에 ‘고아들’이 있는데 이 명칭을 다시 사용해 말하자면 극 중 인물들은 모두 고아다. 그러니까 <금조 이야기>는 고아들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연대는 눈물겹고 때로는 매정하다.

그렇다면 <금조 이야기>에서 나오는 이들은 모두 같은가? 그렇지 않다. 차이가 있으며, 특히 들개가 다르다. 아무르라는 표범은 야생성을 잃고 사육되면서 들개의 삶을 살기로 한다. 그리고 죽음 직전 금조 덕으로 목숨을 구하고 결심한다. “이젠 내가 널 도울게” 전쟁터에선 모두가 누군가의 신발을 빼앗는 신발 장수이지만, 들개만은 금조에게 몸을 내어주며 신발 장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가 아이한테 전해지길 원한다. 들개는 어쩌면 공포의 신발 장수 이야기를 나눔의 ‘들개 이야기’로 바꿔내고 싶은 존재이다. 들개와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메밀밭이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누군가의 식량이 되고 생명이 된다. 그렇다면 들개는 어떤 존재일까? 메밀밭과 같은 자연인가? 사람 이후의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사람보다 괜찮은 표범이자 개인가? 이 질문 자체가 들개의 표현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들개의 모양을 가졌으나 그 실체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방식. 끊임없이 혹은 문득, 저 존재가 무엇인지 환기하는 방식이 들개의 표현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면마다 다른 배우가 들개의 탈을 쓰고 들개를 연기했다. 배우가 가진 질감과 들개가 처한 상황이 달라, 같은 들개이지만 다른 존재로 보이기까지 했다. 들개를 맡을 배우를 캐스팅할 때, 서로 다른 질감의 배우를 배치하려고 했다. 

   덧붙여서 나누고 싶은 것은 곰과 말에 관해서다. 대본 독회 후 진행된 희곡 수정에서 동굴에 홀로 남아 주먹밥을 싸던 여인 옆으로 사람이 아닌 곰이 나타난다. 작품의 세계관이 더욱 넓어진 계기라고 생각하는데, 여인은 주먹밥을 같이 나누고 싶은 존재로, 곰에게 잠시 있기를 애원한다. 공연을 준비하던 모든 이들이 여인이 곰에 잡아먹혔거나 다른 이유로 죽임을 당했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다른 상상을 해봤다. 곰이 잠시 앉아 주먹밥을 먹었을 거라고, 혹은 여인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일어났을 거라고. 때에 따라서는 곰의 이야기를 여인이 들어줬을 거라고. 극 중에 이런 질감의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바로 폴이라는 말이다. 폴은 죽음을 앞두고 다시 달리는 꿈을 꾼다. 조용히 누군가의 사냥감이 되려고 하는 말, 모든 것을 이미 내어주었고 목숨마저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말과 곰이 들개와 같은 부류로 엮이길 바랐다. 그리고 이들에게 의인화의 방법보다는 사람이 잠시 들개가 되고, 말이 되고 곰이 되려는 노력을 했다. 


2. 메밀밭

가끔, 대본을 거꾸로 읽는다. 이야기의 결말부터 그 사건의 흐름을 역 순으로 다시 짚어 보는데, 대본을 이해하는 나름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여긴다. 사건의 도미노를 역순으로 되짚으면서 필연적인 도미노를 복기해 보는데, 희곡이 인과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닐 테지만, 이 과정을 통해 그렇지 않은 작품의 특징도 파악하게 된다. <금조 이야기>에서 마지막 장면은 언덕, 드넓은 메밀밭이다. 오래도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메밀밭엔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메밀밭에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이야 자연의 섭리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테지만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전 앞 장면은 금조가 들개이자 표범인 아무르를 먹는 장면이다. 참고로 김도영 작가는 ‘먹는다’라는 표현을 그리 내켜 하지 않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이 나을 거 같아 나는 ‘먹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금조가 들개이자 표범인 아무르를 먹고, 메밀밭에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인과적이지 않은, 인과적일 수 없는 두 사이의 간극을 금조가 맞이하고, 이것이 <금조 이야기>의 대단원이기 때문에 이 사이의 도약을 오래 곱씹었다. 금조와 아무르는 왜 먹고 먹힐까. 전쟁의 참혹함인가. 이 결과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길래, 이들은 서로 먹히고 먹는 것일까. 가죽만 남아있는 쭉정이 같은 몸에 어떤 생각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금조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들을 담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그 순서나 사실관계를 해체한다. 수력발전소 장면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나 한국전쟁의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인물들은 1.4후퇴 이후 남북 대치 상황과 관계없이 남북을 오간다. 그렇다면 <금조 이야기>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금조는 역사의 기록된 사실들과 무관하게 전쟁에 놓인 사람들 사이를 미끄러진다.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어슬렁거린다. 어쩌면 금조는 딸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그저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으면 영영 찾지 못할까봐, 그 두려움으로 정처 없이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 금조가 맞이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어떤 복잡한 가치관이 아니라, 그저 견딜 수 없는 배고픔, 영양실조의 상태였다. 아무르도 마찬가지다. 아무르는 징검다리 같은 몇 개의 장면을 지나, 몸을 내어주는 존재가 된다. 아무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르의 도약 사이에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그가 맞이한 것은 노쇠한 자기 생의 끝, 그 자체였다. 아무르와 금조는 더 이상 생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먹고 먹힌다. 

그런데, 이 행위가 거룩하다고 여겨졌다. 정처 없는 발걸음 뒤 맞이한 생의 끝, 그 끝에서 이루어진 가장 원초적인 행위가 나를 정화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들의 선택은 수많은 살육과 다를 바 없지만, 삶의 명분을 찾아 온 힘을 다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였다. 먹고 먹히는 것은 어쩌면 몸을 내어주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경이로운 과정일지 모른다. 동행한 아무르를 먹고 금조는 언덕을 올라 새하얀 메밀밭을 맞이한다. 난, 무심하게 흐드러진 꽃들이 무서웠다. 그 무심함이 두려웠고, 또한 안도하게 했다. 금조 역을 맡은 윤현길 배우와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의견을 나누었는데, 윤현길 배우는 하얗게 흐드러진 메밀꽃을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도 했고, 두려움으로 뒷걸음칠 것 같다고도 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윤현길 배우와 내가 비슷한 것을 감각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금조가 메밀꽃을 보고 웃음 같은 울음을 지을 때 그것이 두려움과 안도의 들숨과 날숨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장면, 활짝 피어있는 메밀꽃이 어떤 상징이나, 연극적 표현으로 도약하길 원치 않았다. 가장 풍성하게 재현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영상을 사용하였다. 갑자기, 느닷없이, 무심하게 극장에서 메밀꽃이 피어나길 원했다. 


3. 이끼

<금조 이야기>를 대표하는 공간을 극 중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수력발전소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개마고원을 밀어내고 한 시대의 용광로 역할을 했던 수력발전소는 시간이 지나 그 용도가 폐기되고 군부대로 사용된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 아마도 군부대의 용도가 폐기되고 또 다른 쓰임을 부여받았으리라. 더 정확히 말하면 <금조 이야기>의 대표 공간은 세워지고 부서짐을 거듭했을 수력발전소의 터, 그 자체이다. 

<금조 이야기>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수집했을 때, 가장 많이 찾고 보관한 이미지가 이끼였다. 시간이 지나, 오래 방치된 쇠붙이에도 어느새 끼어 있고 폐기된 건물에도 원래 그랬던 양 자리 잡은 이끼가 왠지 <금조 이야기>의 인물들 같았고, <금조 이야기>의 세상 같았다. 확 피어났다가 쓱 닦아내면 사라지듯이 <금조 이야기>의 무대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빈 무대를 ‘곧 비어질 수 있는 무대’로 정의해서, 생겨남과 사라짐이 언제든, 어디서든 가능할 수 있게 무대의 구조를 계획했다. 남경식 무대디자이너가 합판을 깔아 포장과 장식을 덜어낸 미완성의 질감을 제안했을 때, 바싹 마른 공간으로 이끼가 끼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았다. 기어코 생겨나는 이끼처럼, 바싹 마른 합판 위에서 등장인물이 피어나고 사라진다면, 폐허 속에 메밀꽃이 피어난다면 끈질긴 생명력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생명력이 어쩌면 메밀밭의 이면이 아닐까 싶었다.

<금조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여지도 남겨놓지 않고 희망을 싹둑 잘라버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파괴가 실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냉혹했지만 다른 토를 달 수 없었다. 인간의 세계를 동물로 빗대는 것이 우화라면, <금조 이야기>는 지구의 시간을 인간에 빗댄 우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우화집처럼 장면마다 다른 장르가 교차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개연성이나 통일성이란 말을 잠시 뒤로 미루어도 되겠다 싶었다. 관객과의 대화 때 어떤 관객이 이런 질문을 했다. 연출로서 작품 창작과정에서 가장 주안점으로 삼은 것이 무엇이냐고. 그때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을 보며 작업했다고 답을 했다. 나무와 나무를 어떻게 연결할지만을 고민했다. 연습 때 실제로 그랬고, 그러면 될 것 같았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세상을 품은 씨앗처럼 절망적이고 희망적이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삶의 완성

놀이라는 일종의 전통

가질 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