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씌어준 사람들

너가 이렇게 연출을 못할 줄 몰랐다고 하시며 3만 원을 주셨다. 장소는 진미식당이었고 앞에 계신 분은 윤영선 선생님이었다. 당근인지 채찍인지 모를 돈을 주머니에 넣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 그래도 고생은 했다고 주시는 돈인지, 그까짓 것 빨리 해치우고 술이나 마시라는 소린지 다시 생각해 봤지만 가늠하기 어려웠다. 뭔가 막막하고 싸늘한, 다시 회상할 때면 그때 그 기분을 초겨울의 날씨라고 표현했다. 어쩔 수 없는데, 그냥 쓸쓸하고, 그냥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한계 같은 벽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다음 연출도 잘했을 리가 없고, 선생님은 1년 동안 인사를 받지 않았다. 무슨 선생이, 옹졸하게 인사도 받지 않나 싶었는데 돌아가신 날 많이 서럽고 슬픔이 북받쳤다. 연극원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말이 조금 줄었고 책을 읽는 시간이나 영화를 보는 시간 역시 조금은 줄어든 것 같다. 그냥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중, 고등학교 때 농구에 빠져 있었는데 가까운 곳에 활자로 정리된 농구 교본을 두었다. 성인이 되어 수영에 빠져 있을 때도 프린트된 수영 교본을 들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세상에 이론이란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은 몸의 마찰을 통한 실행의 결과였다는 것을. 누군가가 이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글쓰기의 노동이 들어간, 사고의 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계기 없이, 어느 순간. 연극원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입시 면접 때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준 것이 기억난다. 중,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면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이 그리 많지 않았던 거 같다. 사실,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연극원을 다니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긴 건 면접 날이었다. 서울 상경 첫날, 그러니까 서울에서 첫잠을 자고 일어난 날 나에게 벌어진 청천벽력 같은 일은, 저녁에 묶어둔 자전거가 없어진 것이었다. 눈뜨고 코베인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실제로 베인 것 같이 싹둑 잘린 자물쇠만 덩그러니 전봇대에 남아있었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자전거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재훈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봐라. 신기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신기했고 권위를 가진 분과 일상을 나누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은 다정함과 관심의 표현만이 아니라 책임을 물을 때도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화를 위한 존재의 부름이랄까, 숨어있고 싶을 때 이름이 불렸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이렇게 힘들어도 괜찮은가. 평생 이렇게 괴롭다면 나의 삶은 괜찮은 것인가. 이름이 불리기 위해, 호명에 답하기 위해 나를 조금씩 지운 것 같다. 그러면서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거 같다. 내가 뭐라고 이런 고통을 피해 갈 수 있단 말인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이름 앞에 서면 괜찮지 않겠는가. 언젠가 공연을 앞두고 여러 선택 앞에서 고민이 되어 이상우 선생님께 전화를 드린 적이 있다. 기숙사에 있던 나를 학교 앞 울랄라로 불러내셨다. 선생님,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데 너무 무섭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나도 무섭다. 


지금은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는 425호는 예술사 재학 중일 때는 창고로 거의 폐허였다. 창고라고는 하지만 이미 사용기한이 넘은 기자재며 버려진 물건으로 빽빽한 밀림처럼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1년을 보낸 적이 있다. 졸업했으니, 기숙사에서 지낼 수도 없고 생활이 변변치 않아 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창고로 쓰였던 곳이니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누군가가 알아도 호기로운 유랑 생활을 웃음으로 넘겨주었다. 연극원 생활을 회상하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우산을 씌어준 사람들 사이사이를 옮겨 다니며 잠시 비를 피할 수 있었다고, 나만의 공간에서 잠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원 30주년 기념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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