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씌어준 사람들
입시 면접 때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준 것이 기억난다. 중,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면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이 그리 많지 않았던 거 같다. 사실,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연극원을 다니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긴 건 면접 날이었다. 서울 상경 첫날, 그러니까 서울에서 첫잠을 자고 일어난 날 나에게 벌어진 청천벽력 같은 일은, 저녁에 묶어둔 자전거가 없어진 것이었다. 눈뜨고 코베인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실제로 베인 것 같이 싹둑 잘린 자물쇠만 덩그러니 전봇대에 남아있었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자전거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재훈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봐라. 신기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신기했고 권위를 가진 분과 일상을 나누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은 다정함과 관심의 표현만이 아니라 책임을 물을 때도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화를 위한 존재의 부름이랄까, 숨어있고 싶을 때 이름이 불렸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이렇게 힘들어도 괜찮은가. 평생 이렇게 괴롭다면 나의 삶은 괜찮은 것인가. 이름이 불리기 위해, 호명에 답하기 위해 나를 조금씩 지운 것 같다. 그러면서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거 같다. 내가 뭐라고 이런 고통을 피해 갈 수 있단 말인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이름 앞에 서면 괜찮지 않겠는가. 언젠가 공연을 앞두고 여러 선택 앞에서 고민이 되어 이상우 선생님께 전화를 드린 적이 있다. 기숙사에 있던 나를 학교 앞 울랄라로 불러내셨다. 선생님,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데 너무 무섭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나도 무섭다.
지금은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는 425호는 예술사 재학 중일 때는 창고로 거의 폐허였다. 창고라고는 하지만 이미 사용기한이 넘은 기자재며 버려진 물건으로 빽빽한 밀림처럼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1년을 보낸 적이 있다. 졸업했으니, 기숙사에서 지낼 수도 없고 생활이 변변치 않아 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창고로 쓰였던 곳이니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누군가가 알아도 호기로운 유랑 생활을 웃음으로 넘겨주었다. 연극원 생활을 회상하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우산을 씌어준 사람들 사이사이를 옮겨 다니며 잠시 비를 피할 수 있었다고, 나만의 공간에서 잠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원 30주년 기념 백서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