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하품] 공연을 마치고(정리중)

[달콤한 하품]은 숙명가야금연주단의 태교콘서트입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진행한 공연인데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을 만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8회의 공연을 하면서 공연 날짜가 띄엄띄엄 있어 공연마다 셋업을 새로해야 했습니다. 하루 동안 무대, 조명, 음향 셋업을 하고 리허설을 진행한 후에 공연을 해야 했습니다. 공연 자체의 '진행'에 촉각이 곤두섰습니다. 



올해는 다행히 공연날짜가 잘 배치되어 작년과 같은 어수선함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연 자체를 좀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는데 회차를 달리한 공연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고 좀더 좋은 공연을 위한 고민거리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우선 이번 공연에서는 가야금 연주의 굴곡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지난 공연에서 다소 밋밋하다는 막연한 느낌을 지울 수 있는 감정의 절정이 느껴지는 연주회. 그런데 절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을 때 명확치가 않았습니다. 

보통 희곡이나 시나리오에서는 가치관의 변화가 담긴 작은 장면이 모여 절정을 향해 나아가지요. 그래서 이야기에서 가장 큰 변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절정이라 하는데, 가야금 연주회에서는 그 절정을 어떻게 만들어내야 할지 조금 난감했습니다. 그냥 느낌으로 밀어부쳐?

그러다가 우리 장단의 원리에 있는 내고-달고-맺고-푸는 흐름을 공연 전체의 흐름으로 가져오는 것이 어떨까, 싶었습니다. 내고-달고-맺고-푸는 흐름이 이야기의 기-승-전-결과 닮아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인물의 갈등구조에 따라 관객의 기대와 긴장도가 높아지듯이 연주로 관객의 감정을 달아오르게 할 수 없을까?

'내는' 것이 정적에서 연주로 들어가는 초입이고 연극에서 관객의 몰입을 위해 불을 지피는 장면과 유사한 것 같아 작년과 달리 관객과 함께하는 [금목수화토 소리 태교]를 앞으로 배치했습니다. 공연 중간중간에 관객과 소통하는 곳이 많아 무대와 관객의 길트기 정도로 '내는'단계를 설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주 중간에 자리했던 작년 보다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푸는' 것은 쉽게 뒤풀이라고 생각해서 귀에 익은 비틀즈의 연주를 배치했는데 이도 좋았습니다. 관객들이 박수 치며 연주를 같이 즐겼고 극장을 나갈 때 그 경쾌함을 안고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이 역시 공연 초입에 있었던 작년 배치보다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문제는 달구고, 맺는 공연의 몸통이었습니다. 공연 전에 이에 대해 작은 답을 찾으면서 동시에 많은 질문이 생겼는데 바로 숙명가야금연주단의 [숨 그리고 쉼] 연주회를 다녀오고 나서였습니다. 




댓글

  1. 연극연출을 초빙(악! 오빠 멋져요)한건 그 절정을 구성해달라는게 아니었을까? 근데 나 같이 전통음악 모르는 사람에게, 숙명 가야금연주회의 절정은 예전 광고에 나왔던 비보이와 뚜엣인듯. 이걸로도 참 복잡한 대화를 나눴더랬지, 한 수업에서. 근데 음악 공연의 절정에서 타이밍은 언제야? 앙코르 직전?

    답글삭제
  2. 나도 처음엔 다른 장르와의 만남에서 절정을 만들어 보려했어. 그런데 왠지 주객이 전도된 거 같아 머뭇거려지더라고. 좀더 정리해서 글을 이을 건데 재밌는 건 절정이 매 공연마다 바뀌더라고^^

    답글삭제
  3. 저 누군지 찾으셨나봐요. ㅎㅎ 그 머뭇거림에 동의해, 전적으로. 어떤 장르를 만나게 할 것이냐도 문제이고, 또 어떤 성별의 퍼포머와 만나게 할 것이냐도 문제일 수 있다고 봐. 광고는, B-boys들과 가야금을 연주하는 girls의 만남인데, 다시 보니 남성은 현대성을, 여성은 전통을 짊어지고 있다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더라고.
    가능하면, 아주 아주 구체적으로 써줘요. 어떤 요인들이 절정을 만들어냈는지, 다른 요인이 만든 절정은 어떤 차이를 빚는지. ^^

    답글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놀이라는 일종의 전통

삶의 완성

가질 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