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성과 실험이라는 가치를 벗어나 소통하기

주머니 속에 개인 미디어를 지닌 시대, 극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 같이 모일 수 없었던 코로나의 시간을 통과하며 관극 형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할까. 지역과 계층 등 여러 경계 속에서 극장은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나. 출발점은 다르지만 극장에 관한 질문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극장이 무언가를 공연하기 위한 시설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여러 질문과 가치를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여러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터라 낯선 것은 아니다. 삼일로창고극장(이하 삼일로) 역시 극장을 매개로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의 시각으로 불필요한 극장을 상상하고 극장을 향해 질문을 던지거나(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 가성비의 개념을 공연과 연결시켜, 1인 창작자들에 대한 조명과 지원을 시도한다거나(퍼포먼스 포 프라이스 : 클린룸) 삼일로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술인들이 다양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시도를 해보는 작업(리서치 프로젝트: 극장활용법) 등을 통해 동시대 극장에 관한 고민과 질문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삼일로의 올해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19% 삭감되었다. 사업비로만 보면 약 60% 삭감된 금액이다. 서울시 예산 부서에서 판단하기에 삼일로의 운영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보이는 사업예산들을 삭감하였는데, 일부 사업들이 직접적으로 창작 관련 프로젝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창고개방이나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창고개방의 경우 축제형 프로그램이라 창작 프로젝트와 거리가 있다고 보았으며, 재정사업평가 외부 전문가 주요 개선 의견으로는 사업 대상인 청년예술인을 고려한 성과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동시대 창작 플랫폼을 지향하며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지지하는 개방형 공공극장을 표방하는 삼일로의 사업 대상을 청년예술인으로 한정 지은 것도 생소하지만 축제형 프로그램이라 창작 프로젝트와 거리가 있다고 여긴 것 역시 생소하긴 마찬가지다. 문화예술계에 청년 지원 사업이 활발히 제안되던 때가 청년실업 문제가 대두되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어, 청년 지원 사업이 문화예술 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 성과 목표 역시 계량화된 어떤 수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눈을 치켜뜨게 된다. 축제형 프로그램인 창고개방의 세부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창작 프로젝트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극장의 외연을 넓히는 수많은 흔적을 증명하듯 내보일 수 있지만, 축제는 창작 프로젝트와 거리가 멀다는 그 도약 사이에 어떤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혹시 예술의 파급력을 대중성의 이름으로 계량화된 수치로 치환하려는 것은 아닌지, 창창 과정에 참여하고 같이 과정을 공유하는 활동은 창작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3년여의 삼일로 공동운영단의 활동 속에서 어떤 말들 앞에서 잠시 먹먹했던 때가 있다. 알 것 같은데 실상은 짐작이 어려운 말들. 내가 쓰는 말과 같은데 그 이면에 다른 내용이 담긴 말들. 사전적 정의보다 각자의 맥락으로 그 의미를 추론할 수밖에 없는 말들. 대표적인 것이 대중성과 실험이라는 말이다. 극장이 새로운 세대의 수용 방식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이 말들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들, 그에 반해 새롭게 싹트고 있는 가치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가 어떤 가치를 대체하고, 혹은 영향받고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대중성과 실험은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기 위해 우선 점검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은 대중을 일반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중이 친숙함을 느끼는 것, 좋아할 것을 예측하고 예술 활동에 대입해 보는 것이 경우에 따라 필요한 일이지만, 다양한 가치의 창작활동을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질문하게 된다. 대중성이라는 말은 여러 가치가 혼재되어 하나의 의미로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시장성 혹은 시장원리 정도로 대체해서 사용하여야 명확한 의미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색이 문화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시장의 원리를 내세우기 민망하여 다소 그럴듯한 말로 논거를 펼칠 때 차용되는 말이 대중성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얼마가 들었으니 이정도 사람이 모여야지’라는 말이 다소 경박하니 시장원리를 대체해서 마치 예술의 파급력을 논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궁여지책의 언어가 바로 대중성이다. 대중성은 평가나 점검의 시기에 불거지는 말로 누구에게는 백전백승하는 말이고 누구에게는 백전백패하는 말이다. 백전백승하는 쪽은 평가하는 쪽이고, 백전백패하는 쪽은 평가받는 창작자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중성이 논해지는 순간 서로 소통이 안 되네,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중성 이면에 흐르고 있는 시장성, 시장의 원리를 도대체 감당할 수 없는데, 그래서 서로를 넘겨짚다가 본 맥을 짚지 못하고 각자의 조직 원리를 이야기하다가 만다. 여기서 주어가 빠져 있는데 삼일로를 예로 든다면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일로 공동운영단 정도가 될 것이다. 지루하지만 할 수 없이 원론적인 질문을 꺼낼 수밖에 없다. ‘극장은 무엇인가?’ 원론적인 질문은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각자의 조직원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매듭지어진다. 이런 반복은 아마도 대중성이라는 말 대신에 가치의 확산이나 작업의 의미를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성은 늘 계량화된 수치를 향해 나아가지만 가치의 확산과 작업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창작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창작자의 선택에 해석의 시간을 갖게 한다. 더 나아가 창작자가 발견한 형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부는 40부만 인쇄되어 그중 7부만 지인에게 보내져 세상에 전해졌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가 활동하던 러시아제국의 당시 문맹률은 90퍼센트였다. 95퍼센트였다는 문헌도 있다. 대중성의 관점으로 보면 니체와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실험이라는 말이 있다. 창작 지원 사업에 빠지지 않고 심사 기준으로 나열되던 말. 주변에서 둥둥 북을 울리면 창작자들이 높이 치켜들어야 할 깃발처럼 가슴 설레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을 찢고 새로운 무엇을 세상에 내던져야 할 것 같은 그 생동감은 분명 한 시대 예술가들을 숨 쉬게 한 것 같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그 광고를 연극 프로그램 북의 뒷면에 싣던 때, 연극배우가 명동거리나 대학로를 걷고 있노라면 무대 위의 배우를 만난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달려가 아는 체를 하고 사인을 받던 때, 대극장은 블랙홀처럼 관객을 흡수했다고 한다. 물론, 과거의 영광이 다소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언젠가 색이 바랜 공연 프로그램 북을 보고 그 찬란한 기업 광고들에 놀란 적이 있다.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와 취향을 잘 담아낸 소위 대중성 있는 작품들이 대극장을 채울 때 실험이라는 말이 소극장에서 움텄다고 한다. 그때의 활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상업극을 포함한 철옹성 같은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때의 실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도전받아야 할 권위는 무엇일까? 실험이라는 말은 시간을 통과해 다양성이라는 말로 옷을 바꿔 입은 것 같다. 다양한 가치, 다양한 감각은 공연 창작 과정, 공연의 형식, 관극의 형태에 변화를 가져왔다. 일상의 권위에 관한 문제 제기, 성평등한 창작 과정, 극장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과거 실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극장 안의 외침이 일상으로 확장되고 질문들이 다시 극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속 가능한 창작과정을 고민하고, 때로는 만나는 관객 수를 줄여서라도 더 적합한 가치 확산의 방식을 극장에서 고민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존재했던 배우와 관객, 창작자와 극장의 관계, 극장과 세상의 관계에 관해 다양한 변형을 상상한다. 다양성의 세상에선 자신만의 명제를 설정한 창작 활동은 더 이상 실험으로 불리지 않는다. 아니, 불릴 필요가 없다. 전위적인 형식보다 공감과 연대가 우선되는지 모른다. 이런 흐름을 단순히 세대의 문제로 규정할 수 없지만,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다. 세상의 권위에 저항한 반면 일상의 권위는 낭만으로 치부했던 기성세대의 감각은 새로운 세대의 다양성을 어떤 나약함과 미완성의 창작 활동으로 치부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워크숍 같은 말로 말이다. 
2021년 11월 26일 서울연극협회가 주관하고 주최한 제1차 서울 창작 공간 현장토론회가 있었다. 토론회 2부에서 창작연극지원시설 공간소개와 관련하여 당시 박원근 서울시 문화예술과장의 발제가 있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여자가 공공극장으로의 역할을 되짚으며 삼일로를 예로 든다. “삼일로창고극장 같은 경우 공공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공공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많은 연극인이 공공극장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없고, 일부 예술인들이 그 안에서 워크숍 내지나 뭐 이런 것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과연 공공성에 부합한지 한번만 고민해주시고 …… 공공극장의 운영체계가 현장인들이 되어야 하지 않는지 부분도 깊이 고민해주십사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에 당시 서울시 문화예술과장은 “최근에 많이 들은 얘기이기도 하며, 일부 젊은, 소수의 연극인 위주로 삼일로창고극장을 쓰고 있는 거 아니냐 …… 대표 이사도 인지하고 있고,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단계. 다른 방식으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는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담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답을 한다. 요약하자면 일부 젊은 연극인들이 워크숍 등을 진행하는 것은 공공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성이 다양성의 또 다른 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양성의 가치로 삼일로를 채우고 있는 창작자들을 부정적 맥락으로 일부이고 소수로 취급한다. 그러니 소박하지만 유쾌한 부캐들의 워크숍을 통해 참여자들의 예술적 감각을 깨우고, 우리 예술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보는 ‘부캐대전’ 같은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수신될 리 없다. 공감과 연대의 장인 워크숍이 이미 하나의 창작활동으로 가치가 확산되고,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과는 상관없이 미완이고 부족한 그 무엇으로 치부된다. 이미 현장 예술인으로 구성된 공동운영단 체계로 삼일로가 운영되고 있음에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삼일로를 처음부터 일부 예술인들이 워크숍 등을 하는 미숙한 공간으로 치부해서가 아닐까. 


새로운 세대를 수용하기 위한 제언

삼일로가 새로운 세대를 수용하고 다양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극장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삼일로를 비롯해 공공극장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훼손되는 일이 있었다. 작년에 진행된 서울문화재단의 조직개편이 그것인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으며 제안된 극장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은근슬쩍 사라진 것이다. 삼일로는 기존 기획제작팀, 무대기술팀과 함께 극장운영단에 속해 있었으나, 조직개편을 통해 예술청, 서울연극센터와 함께 예술창작본부 산하 대학로센터실로 새롭게 편제되었다. 기존 극장운영단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던 의미를 잠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2018년 서울문화재단 조직 개편이 있었으며 이때 독립 본부로 운영되어 오던 남산예술센터(극장운영팀)가 지역문화본부 산하 극장운영팀과 무대기술팀으로 분리되어 편제된다. 이때 삼일로 운영위원회는 남산예술센터 조직 개편에 대해 삼일로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현장 예술인들의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울문화재단 대표가 참여하는 간담회 및 토론회를 개최하여 서울문화재단과 전문가, 예술인이 참여하는 ‘공공극장 운영 TFT’가 구성되었다. ‘공공극장 운영 TFT’는 지난 한국의 공공극장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공공극장 본연의 의미보다는 관료적 통제, 규율을 우선시하며 배제와 검열을 통한 예술 생태계의 파괴, 창작 활동의 파괴가 이루어진 것에 주목한다. 청와대 블랙리스트 실행 방침에 따라 문체부 지시로 진행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정기대관 공모에서 서울연극협회 등 19개 단체를 배제한 경우와 국립극단의 작품 검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극장이 어떤 구조로 편제되어 있느냐에 따라 독립성·자율성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한 구체적 사례이며 공공극장의 정체성에 맞게 극장 조직 편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한 단적인 예이다. 더불어, 공공극장의 운영 체계를 예민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논의를 통해 제안된 극장운영단이 해체된 것이다. 이는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으며 얻어낸 논의가 사라진 것이다. 극장운영단이 사라진 조직개편은 극장에 관한 수많은 질문은 뒤로한 채 단지 시설 관리 관점으로만 극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극장을 둘러싼 다양한 운영 주체들이 논의에서 배제된 것 역시 짚어야 할 일이다. 


삼일로 공동운영단

삼일로는 2024년 민간위탁운영을 앞두고 있다. 이것은 단지 운영 주체의 변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극장 가치에 관한 변화이며 연속이기도 하다. 동시대 창작 플랫폼으로 예술 현장과 소통하며 극장을 운영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는 누구일까. 기존의 공동운영단은 사업의 기획, 운영, 예산에 이르기까지 운영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운영 주체였다. 새로운 주체 역시 극장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가며 다양성의 가치를 긍정하는 현장 예술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시의 전향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위탁 운영에 관한 관성을 깨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장 예술인이 행정적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 역량을 가늠할 필요도 있지만, 행정의 편의성보다는 삼일로의 미래가치를 우선에 두고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의 성과와 경험이 있어야 진행할 수 있는 위탁운영을 다양한 협의체나 협동조합 등도 도전해볼 수 있게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시장의 원리를 벗어나 작업의 가치에 관해서, 작업의 의미에 관해서 소통할 수 있을까. 다양성의 가치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까. 극장 안에서 여러 형태의 공연 가능성을 탐구하고 다양한 경계의 질문을 펼쳐낼 수 있을까. 우리가 정의하려는 그 어떤 것, 이를테면 극장이라던가 연극이라던가 그 무엇은 영원한 미완성의 언어로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낯선 것을 환영할 수 있을까. 창작의 공간이자 공론화의 장이자 끊임없는 변화를 긍정하는 곳, 삼일로가 그런 곳이 될 수는 없을까. 이런 질문들은 어쩌면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방법이지만 다른 가치의 발견을 위한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극평론, 2023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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