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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 수 없는 것

얼마전 테슬라 모델Y를 계약했다. 차량 가격이 5699만원이고 보조금을 받으면 약 5000만원이 되는 차였다. 푸어로 사느니 카푸어로 살자, 라는 객기도 있었고 변화없는 생활, 특히 경제적으로 도약없는 삶에 작은 돌을 던지고 싶은 호기로운 맘도 있었다. 뭔가를 소비하는 것과 경제적 도약과는 상충되는 일이지만, 서로 다른 길이 하나로 보였다. 뭐랄까. 깊이 사랑했다고 해야하나. 사랑했기에 어떤 고통도 나아가야 할 길로 보였다. 처음엔 머뭇거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들었고 차대번호가 배정 되었을 땐 마음을 굳히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필요한 물품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한무더기 작지 않은 소비였다.  자전거를 싣고 강원도 임도를 향해 가는 길, 차박을 준비하며 파트너와 쿵쾅대는 길을 상상했다. 온갖 안락한 테슬라 라이프를 꿈꾸었지만 결과적으로 난 다른 차를 구입했다. 근 10년을 택시로 사용한 주행거리 이십만이 넘는, 어떤 이는 폐차를 했을지 모를 차였다. 계약이 많아 모델Y를 올해 안에 받기 어려워졌고 다른 여건도 도와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빚을 지지않고 내 삶 안에서 무리하지 않는 범위의 차를 구입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모델Y를 인도받지 못하겠다 생각한 날 깊이 서글펐다. 카푸어도 되지 못하는 구나, 젠장.  얼마간 우울했다. 이별후 만남의 시간을 복기하듯 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떤 날이 떠올랐다. 그 날, 어두운 방에 누워 내 몸만 세상의 바닥 밑으로 꺼지는 것 같아 깊이 절망했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2층 집에서 낮에도 눅눅하고 컴컴한 반지하로 이사온 날이었다. 그때, 알았다. 어린 시절 절절한 가난에도 호기로울 수 있던 건 황토와 햇빛 덕분이었다는 것을. 가난해도 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한때 부풀었던 나의 맘에 작은 바람막이를 쳐주었다. 모델Y를 갖고 싶은 맘엔 순수한 기호와 애정이 가득 있었는지 모른다고. 그 욕망은 그리 탐욕스럽지 않았다고. 우습게도 차를 인도받은 강...

기도하는 마음

1. 연약하고 연약해지자, 라고 다짐하며. 이것이 나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라는 생각이 들어 두렵다.  인생을 완성하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창작자로서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생각하며 생과 사의 경계, 삶이 엉킨 곳곳을 통과하는 삶을 되새긴다. 읽을 책들이 책상에 쌓여만 가는데, 책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속적이다. 주머니속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있다. 게으르지만 뾰족한.  2. 매일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은 나아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3. 내년 7월의 공연 제목을 <제목들>이라고 붙였다. 돌이켜보면 고통과 슬픔만이 경험이었다. 그것만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그곳에 떨구어져 우연히 고이는 슬픔만이 유일한 교감의 흔적이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 앞에서 넉살을 부리고 싶지 않다. 사이와 침묵 앞에 초라해지고 싶다.  4. 밥에 관해서 생각한다. '먹고 사는' 은유적 표현이 아닌 구체적인 한 끼의 식사에 관해. 요즘 혼자 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그 과정이 고단하고 힘이 들었다. 같이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애써 혼자 먹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때문에 그랬을까, 질문하다 답을 만나고. 다시 질문한다.  5. 쓴다.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견고딕-걸> 작업노트

대본 한쪽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이라고 적어 두었다.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그저 괴로워만 하고 있는 인물들이 나를 이끌었다. 타살과 함께 자살이 벌어진, 살인을 저지른 피의자가 사망하면서 공소권이 소멸된 사건. 그 주변에 남겨진 이들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가늠할 수 없도록 볼드 빵빵한 견고딕의 모습, 즉 고딕 메탈 스타일에 숨어 있는 가해자의 쌍둥이 자매 수민이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각자의 깊은 구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엄마 최진희와 아빠 김우철이 있었다. 피해자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 수민은 친구를 만나는데 피해자의 눈을 기증받은 미나, 심장을 기증받은 현지가 그들이다. 이들은 두려운 길을 문턱을 넘듯 통과의례처럼 지나쳐가는데 이들은 왜 수민과 함께 할까. 어떤 경험도 공유하지 않은 이들은 처음 만나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이들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의 시간을 경험했기에 서로의 고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고통을 경험했기에 고통 옆에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견고딕-걸>이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는 것은 아닌가 질문한 적이 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결과를 마주 보지 않고 우회로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피, 핑계 등의 말을 적어두었다. 가해자의 쌍둥이 자매 수민은 이 세상과 영원히 이별하기 전 피해자의 가족에게 한 걸음씩 다가간다. 그리고 사과하려고 한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괴로움이 나의 주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내가 마주해야 할 일이며 내가 짊어질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민은 가해자의 책임을 짊어지는 과정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은둔의 삶과 이별하고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수민뿐만 아니라 <견고딕-걸>의 등장인물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살아갈 방법으로 마주한 ...

대중성과 실험이라는 가치를 벗어나 소통하기

주머니 속에 개인 미디어를 지닌 시대, 극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 같이 모일 수 없었던 코로나의 시간을 통과하며 관극 형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할까. 지역과 계층 등 여러 경계 속에서 극장은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나. 출발점은 다르지만 극장에 관한 질문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극장이 무언가를 공연하기 위한 시설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여러 질문과 가치를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여러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터라 낯선 것은 아니다. 삼일로창고극장(이하 삼일로) 역시 극장을 매개로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의 시각으로 불필요한 극장을 상상하고 극장을 향해 질문을 던지거나(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 가성비의 개념을 공연과 연결시켜, 1인 창작자들에 대한 조명과 지원을 시도한다거나(퍼포먼스 포 프라이스 : 클린룸) 삼일로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술인들이 다양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시도를 해보는 작업(리서치 프로젝트: 극장활용법) 등을 통해 동시대 극장에 관한 고민과 질문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삼일로의 올해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19% 삭감되었다. 사업비로만 보면 약 60% 삭감된 금액이다. 서울시 예산 부서에서 판단하기에 삼일로의 운영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보이는 사업예산들을 삭감하였는데, 일부 사업들이 직접적으로 창작 관련 프로젝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창고개방이나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창고개방의 경우 축제형 프로그램이라 창작 프로젝트와 거리가 있다고 보았으며, 재정사업평가 외부 전문가 주요 개선 의견으로는 사업 대상인 청년예술인을 고려한 성과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동시대 창작 플랫폼을 지향하며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지지하는 개방형 공공극장을 표방하는 삼일로의 사업 대상을 청년예술인으로 한정 지은 것도 생소하지만 축제형 프로그램이라 창작 프로젝트와 거리가 있다고 여긴 것 역시 생소하긴 마찬가지다. 문화예술계에 청년 지원 사...

<견고딕-걸> 연출의 글

양심이라든가 죄책감이라든가 잴 수 없는 감정의 무게가 실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정자들의 뻔뻔한 얼굴 뒤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어떤 마음의 소리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견고딕-걸>을 사랑하고 오랜 시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안간힘이 삶의 유일한 방편이라는 고통과 위로 때문입니다.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나와 얽힌 세상을 마주 보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작품의 여정을 통해 배웁니다. 지금 빠져있는 구멍이 다른 세상을 맞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도박 같은 마음을 가져봅니다. 

공전과 자전

처음엔 코로나 후유증이겠거니 싶었는데, 어쩌면 내 삶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획으로 도는 내 삶의 공전주기에 분명 변화가 생겼구나 싶다. 그러다보니 자전 주기도 달라졌다. 그러던 차에 길을 걷다, '집은 삶의 플랫폼'이다 라고 메모를 했다.  따릉이를 타거나 걸어서 수영장을 갔다 올 수 있고, 집 앞에 천이 흘러 저건 뭐지 하는 새들도 볼 수 있는 곳. 방학동 터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늙어 죽을 수 있다면, 이런 환경을 좀 더 안정적으로 다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 이라는 불가능의 언어를 꿈꿔도 되는 것일까.  인식을 넓힐 수 있는 책상이 놓여져 있고, 여행하듯 산책할 수 있고, 아침 해로 잠을 깰 수 있는. 노동이 아닌 활동으로 돈을 벌고 자립이 동력이 되어 삶과 맞닿을 수 있는, 그런 터전이 집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도시'를 생각해 본다. 빈자의 미학을 도시의 틈바구니에서 실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도시의 지하에서, 변두리에서 삶을 이어왔지만, 미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혜가 좀더 필요한 것 같다. 세속과 함께 숨쉬기 위한, 우정의 관계망. 그리고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