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

텍스트가 A4 활자에서 
배우의 몸으로 이동할 때가 있다. 
혹은 공간으로. 


대본을 열심히 봐야 하지만, 

어느 순간 대본이 읽히지 않을 때가 있다.


이제 대본이 텍스트로 기능하지 못하는구나, 

이제 텍스트가 대본에서 저 무대의 것들로 

이동했구나, 생각한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없을 때, 

내가 해석해야 할 텍스트가 이제 공간이 되었구나, 

게으름을 다른 탓으로 돌려본다. 


가족을 사랑하세요, 라고 물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함뿍 느낄 수 있는 행사였고

모두가 도취된 채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넌지시 던지는 질문에 왠지 여러 복잡함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 분이었다. 


가족을 사랑하세요?


질문을 받은 분은 피식 웃었고, 

네, 사랑합니다 라고 답했다. 


가족이 있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집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세 개의 톨게이트 중

하나를 지나쳤을 때, 되뇌었다. 


집이 비어 있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고통은 나누지 않아도 

흩어질 것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이었다. 


반려묘, 고래와 인사를 나눈 후

책상에 앉아 어제, 그제, 그끄제 들췄던 대본을 다시 펼쳤다.


등장인물은 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채 무너지고 있었는데,

무너진 곳에서 다시 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통에 설렜어요, 라고 쓴 메모가 낯 뜨거워 

펜으로 슥슥 지웠다.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유목민처럼, 

나도 당파성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려나.


야야, 유목은 무슨!

피식 웃는다. 


그래도, 생존의 안간힘이 지혜가 되고 

도시에 정주하며 유목할 수 있잖아. 


대본에서 무대로 이동하듯 

생각은 흐를 수 있잖아. 


후퇴 없는 긍정은 이 악물 때 피어나잖아, 

도망치듯 이동할 때 필요한 것만 움켜쥐잖아. 


그러다, 털썩

주저앉는다. 


아고, 힘들다. 


……


어제, 그제, 그끄제 들췄던 대본을 다시 떠올린다. 


……


다짐으로 가볍게 필요한 것만 움켜쥘 수 있을까. 

난 아직 버겁게 무겁다. 


……


그래도, 그래도

이동하려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1docci, 𝗥𝗲𝗮𝗱𝗶𝗻𝗴ㅣ기획연재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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