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

도시락 700개를 동네 점포에 주문했는데
사장님이 주문 내용을 가만히 듣더니 말씀하셨다. 


떨립니다. 


사장님은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고

끙끙대며 트렁크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2년 후, 길을 걷다가 

어딘가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도시락집 사장님이었다. 


또렷하게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무슨 말을 나눴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점포 안이 환했던, 사장님 웃음이 기억난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래된 나무 기둥이 떠오른다. 


절이나 고택을 지탱하고 있을 법한 

검붉게 색이 바랜 기둥. 


경험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 기둥에 손때 묻는 것처럼 

결을 만드는 것 같다. 


사장님의 인사가 포근했던 것은 

그 결이 잠시 드러나서가 아닐까. 


나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 흔적으로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바다는 동해라고 하는 친구와 

서해를 찾았다. 


물때를 맞추지 못해 

갯벌만 펼쳐진 바다 아닌 바다를 걸었는데


얼마나 걸어야 바다가 나오냐는 핀잔과

역시 바다는 동해라는 무시 섞인 비난 속에서도

같이 걸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허탕은 쳤지만 돌이켜보면

다 바다였다.  


소설가가 꿈일 때 

제대로 퇴고를 마친 작품이 없었다. 


그래도 소설가가 꿈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꿈으로 누군가를 흠모하고 

질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 등쳐먹고서라도 살아라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말이 이유 없이 찡한 건

고통과 슬픔의 어느 경계에서 피어났기 때문이다.


끙끙대는 존재를 

사랑한다. 


화가가 물감과 종이를 만나듯

난 사람을 만난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때론 밥 한 끼에도 체할 수 있는.


그래서 다양한 넉살을 피우다가도

결국 같은 길로 온다. 


어떤,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 같다. 


타인과 비교해서 찾을 수 없는

넉살을 부린다고 해소될 수 없는. 


늘, 끝에서 

익숙하고 새로운. 


무섭고도 떨리는. 


막다른 길이 다행인 것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docci, 𝗥𝗲𝗮𝗱𝗶𝗻𝗴ㅣ기획연재 6회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삶의 완성

놀이라는 일종의 전통

가질 수 없는 것